오쇼젠 타로와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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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오쇼젠 타로 “15번 조건화” vs “팔마로사”
읽음 5,459 |  2017-11-23




    넓은 초원이었다. 수많은 양떼들이 무리 지어 평화로운 한 낮을 즐기고 있었다. 바보에게 주어진 이번 미션은 ‘사자’를 찾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이렇게 많은 양떼들 사이에서 어떻게 사자를 찾을 수 있지? 정말 사자가 있기는 한 것일까?”

    얼마나 양떼들 사이를 누비고 다닌 것이었을까? 도무지 사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해는 벌써 하루 일과를 마칠 준비를 하는 듯, 서쪽 먼 하늘부터 불그스레 물들고 있었다. 순간 바보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지. 여기보다 높은 곳에 올라가 보자. 멀리서 보면 사자가 보일지도 몰라.’

    바보는 재빠르게 주변의 언덕을 올랐다. 어렵지 않게 나지막한 언덕을 올라온 바보는 양떼가 모여 있는 들판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 때였다. 바보의 눈에 너무나 선명하게 사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쩌면 그토록 눈에 띄지 않았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바보는 사자의 위치를 다시 머릿속에 새기며 언덕을 한 달음에 달려 내려갔다. 이윽고 바보는 사자를 마주했다. 젊고 힘있어 보이는 사자였다. 윤기 나는 황금빛 털과 날카로운 두 눈은 누가 보아도 용맹한 사자의 모습이었다. 조심스럽게 사자 곁으로 다가간 바보는 사자에게 말을 건넸다.

    “안녕, 사자야. 너를 만나게 되어서 정말 반가워.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니?”

    바보의 갑작스런 출현에 사자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뒷걸음을 치던 사자는 주변의 양들 사이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바보는 사자의 그런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나 공격을 당하지 않을까 긴장하던 터였는데 사자의 모습은 마치 자신도 양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양의 소리를 어설프게 따라하고 걸음걸이 역시 양들처럼 총총거리는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바보는 다시 사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사자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말을 걸어보았다.

    “사자야. 넌 양이 아니야. 나랑 이야기 좀 할 수 있겠니?” 

    바보를 피하던 사자의 모습은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좀처럼 분간하기 어려워졌다. 바보는 내일 아침 다시 사자를 만나러 와야겠다고 결심하며 잠을 청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발길을 돌렸다. 별빛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자소서’라는 것이 있다. 취업준비를 하거나 대입전형을 준비할 때 작성하는 ‘자기 소개서’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일반적인 취업을 위한 ‘자소서’에는 지원자의 성장배경, 학력사항, 이력 및 경력, 성격, 포부 등을 기재한다. ‘자소서’를 작성하는 목적이 회사에 의해 간택 받기 위함에 있으므로 자소서 잘 쓰는 법의 으뜸은 지원하고자 하는 회사의 성격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추는 것이다. 회사가 바라는 유형의 사람이 ‘자수성가한 노력 형’이라면 ‘자소서’속의 나는 칠전팔기의 정신을 가진 사연 많은 누군가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고 회사가 바라는 유형의 사람이 ‘능력 있는 천재 형’이라면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는 만능 해결사로 등장할 것이다. 이러한 ‘자소서’속의 인물이 과연 진정한 ‘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인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이 사용한 ‘페르소나’로 설명이 될 것 같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따라서 사회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면서 얻어진 자아의 또 다른 측면이 존재하게 된다. ‘융’에 의하면 이를 외적인 인격으로 분류하고 ‘페르소나’라고 불렀다. 결국 ‘페르소나(persona)’란 한 사람이 사회와 만나서 관계를 형성하는 복합적인 전체를 일컫는다. 이는 개인적인 행동으로 보이지만 집단적인 정신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페르소나’는 자주 진정한 자아와 충돌을 보이기도 한다. 

    지구상에는 74억 인구 숫자만큼 다양한 자아가 존재한다. 하지만 사회화가 진행될수록 다양한 자아는 몇가지 계층을 대표하는 ‘페르소나’가 중심을 이룬다. 사회의 다수를 이루는 ‘페르소나’에 의해 소수의 ‘페르소나’는 다수를 따르도록 강요받는다. 결국 나 자신도 내가 누군지 알기가 어렵다. 오쇼젠 타로의 ‘조건화’ 카드는 그렇게 강요 받은 페르소나를 보여주는 것 같다. 똑 같이 그려진 양들의 모습도 처음에는 달랐을지 모를 일이다. 그들의 진정한 모습은 원숭이일 수도, 호랑이일 수도, 독수리일 수도 있지않을까? 카드 속 ‘사자’의 모습은 내면의 진정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리라. 진정한 자아의 모습을 잃어버리면 그 존재는 ‘건강한 의심’을 할 수 없게 된다. 주변에서 안내해주는 모든 것을 비판없이 받아들일 뿐 자신만의 필터를 작동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다수의 교육이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대한민국의 큰 상처인 ‘세월호’ 참사도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의심’ 없이 ‘믿음’으로 받아들인 일 중 하나이다. 그 ‘믿음’ 속에는 다수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배려도 있었을 것이고, 두려움 때문에 정상적인 판단을 못한 것도 있었으리라. 이유가 무엇이든 그 수많은 학생들은 ‘조건화’의 배움 속에 길들여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건강한 의심’은 필요하다. ‘페르소나’가 사회를 구성하는데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것이라면 ‘건강한 의심’만이 페르소나와 내면의 정신이 소통하도록 신호를 준다. 주변의 거짓에 상처 입고 피해보는 많은 일들은 결국 내가 가진 ‘건강한 의심’이 작동하지 못한 탓이리라. 낡은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 대신에 ‘건강한 의심’을 통한 ‘순응함’을 도와줄 향은 무엇이 있을까? 로즈향을 닮은 ‘팔마로사’를 떠올려본다.


    (이미지 출처 : greenliferemedy.com)


    팔마로사는 벼과의 식물이다. 가녀린 초록의 잎이 무성하고 처음에는 청색빛이 도는 꽃이 잎사귀 끝에 달리다가 점점 붉은 색으로 바뀌어진다. 향은 꽃이 피기 전에 체취한다. 팔마로사는 동인도 제라늄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인도에서는 로사(rosha) 또는 루사그라스(russa grass) 로 알려져 있다. 팔마로사의 향은 보기와는 정말 다르다. 푸른 잎사귀가 무성한 모습을 보면 그린계열의 상큼한 향을 떠올리지만 ‘제라니올(geraniol)’을 주성분으로 하는 팔마로사는 꽃의 향이 난다. 그것도 로즈를 닮은 향이 말이다. 마치 팔마로사의 페르소나는 푸릇한 풀인데 진정한 자아는 로즈꽃인 듯 하다. 그래서인지 팔마로사는 풀에서 추출하는 향성분이 잘하는 일과 꽃에서 추출하는 향성분이 잘하는 일을 모두 한다. 항진균과 항세균성을 나타내는 반면 심장에너지를 강화하여 심계항진, 불안, 초조, 불면 근심 등에 사용된다. 특히 긴장과 탈진을 수반하는 열감에 좋다. 


    팔마로사 향의 특징을 정리해본다면 순응력과 적응력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순응함은 순종과 다르다. 순종은 자칫하면 옛 것을 비판없이 따르려고 하는 잘못된 보수로 흐를 수 있다. 하지만 순응함은 건강한 의심을 바탕으로 걸러낼 것은 걸러내고 받아들여야 할 것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준다. 마치 제라늄이 자연스러운 균형을 잡듯이 팔마로사도 그와 유사한 작용을 한다. 팔마로사 향이 유난히 끌리는 날에는 삶에서 한 두 번의 강력한 경험이 나만의 법칙이 되어서 나를 제한 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살펴보게 된다. 예를 들어 두어 번 나와 어울리지 못하는 ‘최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경험했다고 하자. 그래서 ‘최씨는 정말 나와 맞지 않아. 다들 고집만 세고’라는 식의 법칙이 생겼다고 하자. 나만의 법칙은 묘한 위력을 발휘한다. 이런 법칙을 가진 사람 앞에는 인격적으로 훌륭한 ‘최씨’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의 법칙은 그렇게 더욱 굳어져만 가게 된다. 이럴 때 팔마로사 오일은 나의 잘못된 법칙을 유연하게 풀어주고 새로운 것에 순응하도록 돕는다. 이러한 원리는 남에 대한 나의 생각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나는 수학은 못하는 사람이야.’라는 식의 법칙을 세워버리면 수학을 잘하는 나를 만나기는 정말 어려워진다. 진정한 내가 아닌 페르소나에 매달리게 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같은 눈높이에서 수많은 양들의 무리 속에 숨어있는 사자를 발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가도 사자를 찾는 것은 훨씬 쉬워진다. 아마 신(神)의 입장에서 우리 인간을 바라보면 그런 느낌일 것도 같다. 인간들은 스스로의 진정한 자아를 찾지 못한다. 하지만 신이 보았을 땐 너무나 명확히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의 눈으로 봐야 한다. 그것이 가장 높은 차원의 순응이고 적응이다. 인간은 결국 신성을 가진 존재이니까 말이다.



    다음날 바보는 사자를 찾아 길을 나섰다. 그 때 어디선가 포효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바보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물가에 다다른 바보는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자세히 바라보며 울부짖는 사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사자의 울음소리에 깨달음의 환희와 지금까지 자신을 제대로 몰랐던 시간들에 대한 통탄이 함께 녹아 있음을 바보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신의 눈높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신의 눈높이’까지 가기 위해서는 ‘건강한 의심’이 필터링을 해주어야 하며 나의 진정한 자아를 왜곡시켰던 많은 법칙들을 흘려 보낼 수 있어야 함을 바보는 배웠다. 물론 제2의, 제3의 사자가 양떼들 속에서 계속 나타날 것이라는 것도 바보는 직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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